「필경사 바틀비」는 언제, 왜 쓰였고 어떻게 읽혀 왔나
1. 언제, 왜 썼나
사실언제
- 1853년 11월호와 12월호 『퍼트넘스 먼슬리 매거진』에 두 차례로 나누어, 작가 이름 없이 실렸다. 원제는 「Bartleby, the Scrivener: A Story of Wall-Street」.
- 1856년 5월 단편집 『피아자 이야기』(Piazza Tales, Dix & Edwards)에 다른 단편들과 함께 묶였다.
- 소설 안의 시간은 1840년대 후반이다. 화자가 존 제이컵 애스터(1848년 사망)의 죽음을 언급하므로 이야기는 그 이후에 서술되고, 화자가 ‘대법관청 서기관’에 임명된 것은 그보다 앞선 일로 나온다.
사실쓰기 직전의 멜빌
| 1851 | 『모비 딕』 출간. 당대 평은 냉담했고, 멜빌이 이 책으로 번 돈은 영국 선인세와 미국 인세를 합쳐 약 1,260달러였다. 이는 앞선 다섯 권 어느 것보다 100달러 이상 적은 액수였다. |
| 1852 | 『피에르』 출간(7월). 혹평이 쏟아졌고, 신문 『데이 북』은 「허먼 멜빌 미쳤다」라는 제목의 기사까지 실었다. |
| 1853 | 『이스라엘 포터』를 단행본으로 내줄 출판사를 못 찾아 『퍼트넘스』에 연재. 같은 해 11월부터 「바틀비」를 포함한 단편을 잡지에 싣기 시작해 1856년까지 열네 편의 단편·스케치를 『퍼트넘스』와 『하퍼스』에 발표. |
| 1850 | 장인 레뮤얼 쇼에게 빌린 3,000달러로 매사추세츠 피츠필드의 농장(애로헤드)을 샀다. 가족은 늘어 가는데 책은 생계를 책임질 만큼 팔리지 않았다. |
추정왜 — 확인된 것과 추정되는 것
생계. 『모비 딕』과 『피에르』의 판매가 너무 저조해 출판사 하퍼 앤 브러더스에 빚을 졌다는 설명이 널리 인용된다. 책 한 권에 의존하던 수입이 막히자 원고료가 확실한 잡지로 옮겨 갔다는 흐름은 사실로 볼 수 있다. 다만 「바틀비」 한 편이 그 빚 때문에 쓰였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다.
『피에르』에 대한 반응. 위키백과가 소개하는 한 견해는 멜빌이 『피에르』의 혹평에 대한 감정적 응답으로 이 작품을 썼을 수 있다고 본다. 이 역시 해석이지 기록이 아니다.
직접적인 불씨. 전기 작가 허셜 파커는, 1853년 2월 18일 신문 『트리뷴』과 『타임스』에 실린 신간 『변호사의 이야기』(The Lawyer’s Story) 광고에 주목한다. 광고에 실린 1장 첫 문장은 ‘엄청난 분량의 증서를 베껴야 해서 임시로 필경사를 하나 더 고용했는데, 그의 얌전하고 신사다운 태도와 일에 대한 집중이 흥미로웠다’는 취지였다. 파커는 그 장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이 한 문장뿐이라고 보았다. 즉 ‘조용하고 신사 같은 필경사’라는 씨앗이 이미 광고문에 있었다는 이야기다.
다른 영향 후보. 앤드루 나이튼은 1846년의 무명작 로버트 그랜트 화이트의 『법과 게으름』(게으른 필경사가 나옴)을 거론하고, 크리스토퍼 스텐은 에머슨의 에세이 「초월주의자」와의 유사성을 짚는다. 또 데이비드 재피는 디킨스의 『황폐한 집』과의 관련을 다룬 연구(1981)를 냈다.
멜빌 자신의 체험이라는 읽기. 멜빌은 아버지가 파산하고 세상을 떠난 뒤(1832) 열두세 살 무렵부터 은행 점원으로 일했다. 뉴욕 월가 변호사 사무실이라는 무대, 베끼는 일로 먹고사는 사람, 파산한 아버지의 기억은 작가의 이력과 겹친다. 이를 곧바로 ‘바틀비=멜빌’로 읽을지는 평론가마다 다르다(아래 3절).
2. 발표 당시와 이후의 평가
- 발표 당시에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이름 없이 잡지에 실린 단편이었고, 이후 『피아자 이야기』에 묶였다.
- 멜빌 재평가(‘멜빌 리바이벌’)는 1919년 탄생 100주년을 계기로 시작되었고, 1921년 레이먼드 위버의 전기 등이 이를 이끌었다. 다만 위버는 1851년 이후 작품을 낮게 보았다. 「바틀비」가 『모비 딕』에 견줄 만큼 유명해진 것은 그보다 한참 뒤의 일이다.
- 오늘날 학자 로버트 마일더는 이 작품을 멜빌 단편의 ‘의심할 여지 없는 걸작’이라 부르고, 2019년 BBC는 ‘가장 영향력 있는 소설 100편’에 올렸다. 토머스 핀천은 1993년 이 작품을 ‘현대 나태의 첫 위대한 서사시’라고 불렀다.
3. 해외 평론: 무엇을 어떻게 읽었나
화자도 텍스트도 바틀비가 왜 그러는지 설명해 주지 않는다. 그래서 해석이 끝없이 갈라진다. 크게 다섯 갈래로 정리할 수 있다.
① 작가 멜빌의 초상으로 읽기 (자서전적 읽기)
레오 맑스(「멜빌의 벽의 우화」, 1953)는 월가의 ‘벽’과 바틀비의 고립을 멜빌 자신의 소외와 연결했다. 로런스 뷰얼은 바틀비를 환멸에 빠진 작가·예술가의 모습으로, 자일스 건은 문단에 대한 멜빌의 환멸이 반영된 인물로 읽었다. 리처드 체이스는 필경사들을 진짜 예술가와 사이비 예술가의 우화로 보았다. 이런 읽기는 ‘독자에게 외면받은 후기 멜빌’이라는 사정과 잘 맞지만, 작품의 사실적 배경을 지워 버린다는 비판을 받는다.
② 사회·노동 비판으로 읽기
월가는 자본주의의 중심이고 필경사는 기계처럼 베끼는 노동자다. 바틀비의 거절은 이 체제 안의 소극적 저항이라는 읽기가 가장 널리 퍼져 있다. 법사학적 접근도 있다. 존 매티슨은 1850년 Brown v. Kendall 판결이 세운 ‘합리적 인간’ 기준, 곧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경제 주체를 요구하는 법·경제 질서에서 바틀비 같은 수동적 존재는 설 자리가 없음을 이 작품이 드러낸다고 해석한다. 이 맥락에서 화자의 ‘신중함’(prudence)은 기독교적 사랑과 실리 사이에서 흔들리는 윤리의 문제가 된다.
③ 화자(변호사) 중심으로 읽기
독자가 실제로 보는 것은 바틀비가 아니라, 바틀비를 보는 화자라는 입장이다. 바틀비를 화자의 ‘심리적 분신’으로 읽는 해석(칸막이로 가려 둔 바틀비는 화자가 억눌러 둔 무의식의 상징)이 있고, 정신분석가 크리스토퍼 볼라스는 화자가 해고를 미루며 바틀비와 점점 동일시한다는 점이 설명되어야 할 핵심이라고 지적한다. 이 갈래에서는 작품이 ‘바틀비는 누구인가’보다 ‘보는 사람은 왜 이렇게 흔들리는가’를 묻는다.
④ 병리·심리, 자유의지·윤리로 읽기
1978년 『ELH』의 한 논문은 의욕 상실, 개인사의 비밀, 단식 끝의 죽음을 우울증의 전형적 증상으로 읽었다. 다른 한편 조너선 에드워즈의 『의지의 자유』, 조지프 프리스틀리의 철학적 필연성론과의 관련을 짚으며, 세상에서 고립된 바틀비가 오히려 ‘완전히 자유로운 의지’를 시험한다고 보는 읽기도 있다. 사회에 짓눌려 사라지는 존재냐, 외부 결정론에서 벗어난 의지냐 하는 양극이 같은 텍스트에서 나온다.
⑤ 20세기 말의 철학적 전회: 들뢰즈·아감벤·지젝·하트와 네그리
- 들뢰즈는 「바틀비, 혹은 상투어」(1989)에서 “I would prefer not to”를 언어를 지시 대상에서 떼어 내는 특이한 ‘공식’(formule)으로 읽는다. 바틀비는 소수 문학이 만드는 이방인이자 ‘새로운 그리스도’, ‘우리 모두의 형제’의 모습이라는 취지로 소개된다.
- 아감벤은 「바틀비, 또는 우연성에 관하여」(1993)에서 이 말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잠재성’을 소진하지 않고 보존하는 선택으로 읽는다. 주권 권력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론이자 순수한 잠재성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 지젝은 『시차적 관점』(2006) 끝에서 바틀비를 새로운 정치의 형상으로 내세운다. 소개된 바에 따르면 그는 이 말을 무관심의 표현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거절로 읽고, 거절을 건설의 ‘첫 단계’로만 보는 해석에 반대한다. ‘하겠다/안 하겠다’의 강요와 반항이라는 게임 자체를 거부함으로써 지배 이데올로기를 곤혹스럽게 한다는 요지로 국내에 소개되어 있다.
- 하트와 네그리도 바틀비의 거절을 정치적 가능성으로 끌어온 이들로 함께 거론된다(『제국』 등). 다만 이 글에서는 해당 대목의 원문을 직접 확인하지 못했다.
이 철학적 전회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연구자 카롤린 베나크는 이런 읽기들을 모아 놓고 보면 권력에 도전한다는 가능성이 오히려 의심스러워지고, 그 공식이 이미 존재하는 권력 구조를 재확인할 위험이 있다고 논한다. ‘“I’d prefer not to”와 해석의 과잉’이라는 제목의 논문은 이 작품이 어떤 해석도 최종판이 될 수 없는 ‘과잉’의 장소가 되었다고 정리한다.
⑥ 한기욱 논문이 다루는 그 밖의 읽기들
- H. 브루스 프랭클린은 바틀비를 예수의 수난(세 번 부인)으로, 혹은 파업·농성하는 노동자로 읽었다.
- 킹즐리 위드머는 비인간적인 세계에 맞서는 혁명적·실존적 영웅으로 보았다.
- 밀턴 스턴은 비평이 바틀비에 매혹되는 ‘나르시시즘’을 비판하며, 바틀비를 변호사와는 다른 양식에서 온 인물, 곧 메타포로 규정했다.
- 존 맥윌리엄스는 변호사의 사고방식을 프랭클린식 실용주의와 연결했다.
- 김영희(1984)는 초점이 바틀비에서 화자로 옮겨 간다고 보고, 작품을 일상인을 향한 아이러니로 읽었다.
- D. H. 로런스는 멜빌의 추상적 감수성과 청교도 전통이 끊어 놓은 사람 사이의 유대를 짚었다. 레슬리 피들러는 굿맨 브라운과 에이해브를 파우스트적 인물로 보았고, 이는 바틀비를 같은 계보에 놓는 근거가 된다.
4. 국내 평론: 어떻게 읽었나
국내 연구는 한국 학술지(KCI) 논문과 번역서 해설, 신문·잡지 칼럼을 중심으로 확인했다. 한국 비평 전체의 지형을 파악했다고 말하기는 어렵고, 아래는 확인된 대표 사례다.
한기욱 — 번역자이자 평론가 (창비 『필경사 바틀비』 2010)
- 번역서(창비 2010)에서 “I would prefer not to”를 ‘안하고 싶습니다’로 옮겼다. 그는 훗날 이 말이 가치판단이나 취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므로 ‘(차라리) 안하렵니다’에 더 가깝다고 덧붙였다.
- 논문 「근대체제와 애매성: 「필경사 바틀비」 재론」(『안과밖: 영미문학연구』 34호, 2013)의 핵심어는 ‘근대체제, 애매성, 불가해성, 잠재성, 형제 공동체’다. 바틀비를 근대체제 속의 불가해한 존재로 보면서 잠재성론과 대화한 글로 읽힌다.
- 창비 주간논평 「‘계속해보겠습니다’와 바틀비」(2015)에서 그는 바틀비의 거부가 비장한 저항의 태도가 아니라 ‘평범한 인간적 면모’가 전혀 없는 유순하면서도 단호한 말이라고 짚는다. 바틀비는 고용주의 요청만이 아니라 삶의 요청 전체를 거부하는 존재이고, 그의 말에서는 ‘산송장같이 차갑고 집요한 의지’, ‘멈춤과 죽음의 리듬’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또 이 말이 동료 필경사들과 변호사에게도 번지는 ‘감염의 언어’임을 짚는다.
한기욱의 「『필경사 바틀비』: 상처입은 영혼의 초상」을 장별로 요약한 읽기 노트는 아래 5절에 있다.
김용성 — 종교적 읽기 (『문학과 종교』 2014)
들뢰즈·아감벤·지젝·네그리 같은 탈근대 사상가들이 작품에서 ‘가능성’과 ‘잠재성’을 낙관적으로 읽어 냈지만, 그 해석이 작품 속 종교성의 깊이를 놓쳤다고 비판한다. 발터 벤야민이 자본주의를 일종의 제의 종교로 본 점을 끌어와, 바틀비가 보여 주는 ‘안식’의 가치를 중시하되 종교적 영성이 빠진 안식은 구원의 답이 못 된다고 주장한다. ‘진정한 안식’은 크로노스가 아닌 카이로스의 시간, 곧 신과 소통하는 시간이라는 논지다.
이광진 — 조직론으로 읽기 (『인문논총』 2015)
경영학의 ‘리더–구성원 교환관계 이론’(LMX)을 적용해, 바틀비가 거절하는 것은 개인 업무가 아니라 화자가 이끄는 조직·비즈니스 자체라고 본다. 화자가 바틀비를 유령처럼 묘사한다는 점에서, 바틀비는 산업자본주의로 가는 미국 사회가 잃어 가는 무언가를 뜻하고, 화자는 그것에 미련을 두면서도 결국 사회의 흐름에 올라탄다고 분석한다.
성민엽 — 대중적 해설 (중앙일보 칼럼, 2026. 3. 20.)
- 가장 일반적인 해석(자본주의 속 소외와 소극적 저항), 들뢰즈·아감벤·지젝의 철학적 해석을 두루 소개한 뒤, 이런 해석들은 소설을 읽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철학을 입증할 사례로 동원된 느낌이 든다고 비판한다. 바틀비를 ‘메시아’로 보는 시각은 공허하다고 본다.
- 알레고리 해석 이전에 작품에 그려진 것 자체를 먼저 읽자는 입장이며, 바틀비의 모습을 우울증에 가까운 병리로 읽는 해석을 수용한다. 이때 한병철의 『피로사회』(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를 끌어와, 19세기 규율 사회의 바틀비는 성과사회의 우울증과 증상은 다르지만 둘 다 탈진·소진이라는 같은 결과에 이른다고 본다. 오늘의 독자에게 바틀비가 기괴하면서도 울림이 있는 이유라는 설명이다.
- 제목의 ‘필경사’가 적절한 번역이 아니라는 지적도 덧붙인다.
5. 읽기 노트: 한기욱 논문 장별 요약
한기욱, 「『필경사 바틀비』: 상처입은 영혼의 초상」 — 논지를 장별로 간추린 개인 학습용 노트입니다. 요약은 노트 작성자(AI인 Claude)의 말로 다시 쓴 것이며, 따옴표 안의 짧은 구절만 논문에서 인용했습니다. 원문은 출판본을 참조하세요. 논문의 서지는 이번 조사에서 별도로 확인하지 못했다. 각 장의 링크는 대역 페이지의 해당 구절로 연결된다.
1장 · 문제 제기
저자는 「바틀비」가 멜빌의 후기 대작들과 달리 언어가 절제된 작품이면서도, 그 절제 때문에 오히려 기이하게 읽힌다고 본다. 이 작품은 부조리극, 예술가 우화, 수난극, 노동 소외 같은 수많은 해석이 부딪치는 자리가 되었다. 저자는 이런 다양성 자체를 미덕으로 여기는 풍토를 경계하며, 해석들을 작품의 실제에 비추어 다시 점검하자고 제안한다. 붙들어야 할 물음은 세 가지다. 바틀비는 누구인가, 변호사와의 관계는 무엇인가, 벽은 무엇을 뜻하는가.
2장 · 우화적 해석 비판
리오 맑스는 바틀비를 독자에게 외면받은 후기 멜빌의 자화상으로 읽었다. 체이스는 필경사들을 진정한 예술가와 사이비 예술가의 우화로, 프랭클린은 바틀비를 예수의 형상으로 읽었다. 저자는 이 읽기들이 각각 일리가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작품의 사실적 지평을 지운 채 상징 풀이에 기대고 있다고 비판한다. 흰 고래가 먼저 고래이듯, 필경사도 먼저 어디까지나 필경사
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이 장의 결론이다.
3장 · 화자 변호사 읽기
부제가 「월가의 이야기」인데도 비평이 우화 쪽으로 쏠린 데에는 삶과 예술을 분리하는 모더니즘적 시각이 깔려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일인칭 제한 시점 때문에 독자가 실제로 보게 되는 것은 바틀비보다 화자 자신이다. 변호사는 편안함과 이익을 우선하는 인물이지만, 냉혹한 고용주라기보다는 동정과 자선까지 비용과 이익으로 계산하는 실용주의자로 그려진다. 저자는 이를 프랭클린, 윌리엄 제임스의 사유와 연결한다. 일요일 아침에 느낀 형제애의 우수
는 진짜 각성처럼 보이지만, 결국 감상과 자기 위안으로 정리되고 만다. 바틀비는 변호사가 내세우는 '가정의 원리'를 거부하는 존재로 놓인다.
4장 · 바틀비 읽기
대다수 비평가는 바틀비의 비타협을 긍정적으로 보지만, 저자는 그가 창조적이든 아니든 삶 전체를 거부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변호사의 묘사에서 바틀비는 고독, 송장 같은 창백함, 기계적인 근면으로만 나타나고, 생명의 활력을 암시하는 대목은 거의 없다. 그래서 위드머처럼 그를 혁명적 영웅으로 보거나 프랭클린처럼 선진 노동자로 보는 읽기는 빗나간다. 그래도 바틀비에게는 변호사에게 없는 기품과 위엄이 있는데, 죽은 바틀비를 두고 변호사가 욥기를 인용하는 장면에서 그것이 드러난다. 저자는 스턴을 따라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소설 양식에서 온 인물이라는 점을 받아들이면서도, 바틀비를 단순한 '메타포'로 보는 데에는 선을 긋는다.
첫인상 → “평범한 인간의 면모”가 없는 얼굴 → 포목점 점원 제안 → “With kings and counselors” →
5장 · 에이헵, 피에르, 그리고 추상화
에이헵, 피에르, 바틀비는 모두 현실의 요구를 거부하는 극단적 이상주의자다. 에이헵이 미쳐 날뛰는 이상주의자이고 피에르가 파산한 이상주의자라면, 바틀비는 이상의 내용은 타 버리고 원칙만 남은 경우다. 『피에르』의 '표준시/지방시' 구도에 대입하면 바틀비는 천상의 시간을, 변호사는 지상의 시간을 사는 인물이 된다. 저자는 바틀비의 비실체성을 결함이 아니라 의도된 형상으로 읽는다. 로렌스가 말한 '인간적 자아가 거의 죽은' 멜빌의 감수성이 그 바탕이다. 그 결과 한 화폭에 극사실화(변호사)와 추상화(바틀비)가 나란히 놓인 듯한 그로테스크한 효과가 생긴다. 다만 이 기법 때문에 작가가 누구 편인지는 흐려진다.
6장 · 미국적 맥락과 결론
저자는 바틀비를 「젊은 굿맨 브라운」과 에이헵의 계보에 놓고, 그의 '영혼의 병'의 뿌리를 청교도의 경직된 정신주의와 캘빈주의적 원죄 감각에서 찾는다. 로렌스의 진단대로, 청교도 전통이 사람 사이의 살아 있는 유대를 끊고 그 자리에 '유용한 기계적 유대'를 들였다면, 바틀비는 그 유산을 끝까지 밀고 간 후예이고 변호사의 월가는 그 결과물이다. 벽은 사실적 배경이면서 단절된 근대 미국의 상징이고, 바틀비의 창 앞에 선 '막다른 벽'은 그의 정신주의가 부딪친 한계를 가리킨다. 저자의 결론은 이렇다. 변호사의 자아는 실용주의 속에서 변질되는 낡은 휴머니즘을, 바틀비의 소진된 자아는 미국적 이상주의의 종말을 보여 준다. 이 둘을 서로 다른 화법으로 함께 그려 낸 것이 이 작품의 성취다.
한기욱이 다른 비평가들을 어떻게 평가했나
비평가들의 읽기 자체는 위 3절에 정리했고, 아래 표에는 논문 속 평가만 모았다.
| 비평가 | 한기욱의 평가 |
|---|---|
| Leo Marx | 상징 환원으로 사실적 지평을 지움. 다만 '인간에 등돌린' 바틀비 지적은 유효 |
| Richard Chase | 작품 내적 근거가 제시되지 않음. 자의적 |
| H. Bruce Franklin | 부분적으로 의미 있지만 작품 전체를 끌어안지 못함 |
| Kingsley Widmer | 바틀비의 반생명적 이미지를 놓침 |
| Milton R. Stern | 양식 구분은 수용. '메타포' 규정에는 유보 |
| McWilliams | 정곡을 찌름 |
| 김영희 | 변호사 논의의 주된 참조점 |
| D. H. Lawrence | 결론의 이론적 축 |
| Leslie Fiedler | 바틀비를 같은 계보에 놓는 근거 |
핵심 개념
- 가정의 원리 (doctrine of assumption)
- 상대가 알아서 따르리라 전제하는 변호사의 처세 원리. 바틀비가 거부하는 대상이다.
- 표준시 / 지방시
- 『피에르』의 플린리먼 팸플릿에 나오는 천상의 절대 기준과 지상의 현실 기준.
- 추상화 / 사실화의 병치
- 바틀비와 변호사를 서로 다른 양식으로 그려 생기는 효과. 저자 해석의 중심축이다.
- 상처입은 영혼
- 욥기 인용과 연결되는, 믿음을 잃은 고립된 영혼으로서의 바틀비.
주요 참고문헌 (논문 각주에서)
- Leo Marx, “Melville's Parable of the Walls,” Sewanee Review 61 (1953).
- Richard Chase, Herman Melville: A Critical Study (1949).
- Milton R. Stern, “Towards ‘Bartleby the Scrivener’” (1979).
- Dan McCall, The Silence of Bartleby (1989).
- H. Bruce Franklin, The Wake of the Gods (1963).
- Kingsley Widmer, The Ways of Nihilism (1970).
- John P. McWilliams Jr., Hawthorne, Melville, and the American Character (1984).
- Michael T. Gilmore, American Romanticism and the Marketplace (1985).
- D. H. Lawrence, Studies in Classic American Literature (1923).
- Leslie Fiedler, Love and Death in the American Novel (1966).
- 김영희, 「“Bartleby the Scrivener”: 일상인을 향한 아이러니」 (1984).
6. 한눈에 보는 비교
| 구분 | 평론가 | 바틀비는… |
|---|---|---|
| 해외 | 레오 맑스, 뷰얼, 건 | 독자에게 외면받은 작가 멜빌 자신의 그림자 |
| 해외 | 리처드 체이스 | 진짜 예술가와 가짜 예술가를 가르는 우화 속 인물 |
| 해외 | 매티슨 | ‘합리적 인간’ 법·경제 질서에서 밀려난 사람 |
| 해외 | 볼라스 등 | 화자의 무의식·분신 (초점은 화자) |
| 해외 | 들뢰즈 | 언어를 흔드는 ‘공식’의 주인, 새로운 그리스도·형제 |
| 해외 | 아감벤 | ‘하지 않을 수 있음’의 잠재성을 지키는 존재 |
| 해외 | 지젝 | 강요와 반항의 게임 자체를 거부하는 정치적 형상 |
| 해외 | 베나크 | 그런 철학적 읽기의 한계를 묻는 비판 |
| 국내 | 한기욱 | 삶의 요청 전체를 거부하는 불가해한 존재, 근대체제와 애매성 |
| 국내 | 김용성 | 종교적 영성과 안식을 묻는 존재 |
| 국내 | 이광진 | 산업자본주의가 잃어 가는 것, 조직 자체의 거부 |
| 국내 | 성민엽 | 알레고리 이전에 먼저 읽을 병리적 인물, 탈진한 현대인의 거울 |
7. 종합: 합의되는 것과 갈리는 것
- 합의에 가까운 것. 이 작품은 하나의 해석으로 닫히지 않는다. 화자의 시선이 한정되어 있어 바틀비의 내면은 끝내 열리지 않는다. 월가라는 자본주의 한복판의 사무실과 벽이 핵심 무대이고, ‘배달불능 우편물’이라는 마지막 소문이 작품에 비애를 더한다.
- 갈리는 것 ①: 거절은 저항인가, 소진인가. 해외 철학자들(들뢰즈·아감벤·지젝)은 거절에서 정치적·존재론적 가능성을 읽는다. 반면 한기욱의 ‘죽음의 리듬’, 성민엽의 ‘탈진’, 일부 병리적 읽기는 거절을 삶 전체의 포기와 소진으로 본다.
- 갈리는 것 ②: 철학에 소설이 동원되는가. 국내외를 막론하고 철학적 해석이 소설을 사례로 삼는다는 비판이 반복된다(베나크, 성민엽, 김용성의 종교성 지적).
- 갈리는 것 ③: 중심은 바틀비인가, 화자인가. 신뢰하기 어려운 화자의 자기 합리화, 곧 ‘달콤한 자기 긍정’을 사들이는 계산이 이 소설의 진짜 주제라는 읽기가 꾸준히 나온다.
- 번역에도 해석이 담긴다. ‘안 하는 편이 좋겠습니다’(선택의 뉘앙스), ‘안하고 싶습니다’(한기욱), ‘그러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등 ‘prefer’를 어떻게 옮기느냐가 바틀비를 다르게 보이게 한다.
8. 출처
- 한기욱, 「『필경사 바틀비』: 상처입은 영혼의 초상」 — 5절의 노트가 요약한 논문(서지 미확인)
- Wikipedia: Bartleby, the Scrivener — 발표 정보, 창작 배경(파커, 나이튼, 스텐), 해석 갈래, 수용 및 각색
- Wikipedia: Herman Melville, Moby-Dick, Pierre; or, The Ambiguities — 멜빌 생애, 『모비 딕』 수입, 『피에르』 평
- 한기욱, 「근대체제와 애매성: 「필경사 바틀비」 재론」, 『안과밖: 영미문학연구』 34 (2013) — KCI
- 한기욱, 「‘계속해보겠습니다’와 바틀비」, 창비주간논평 (2015. 3. 4.)
- 김용성,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에 나타난 종교적 의미」, 『문학과 종교』 19(4) (2014) — KCI
- 이광진, 「…바틀비의 저항 대상 연구」, 『인문논총』 72(3) (2015) — KCI
- 성민엽, 「[괴짜열전] 스스로 자신을 착취한 끝에 탈진하는 현대인의 초상」, 중앙일보 (2026. 3. 20.)
- “I’d prefer not to”: Bartleby and the Excesses of Interpretation — 해석의 과잉(들뢰즈·아감벤·지젝·하트와 네그리 비교)
- Wikipedia: The Parallax View 및 지젝의 바틀비 정치를 다룬 2차 자료(In These Times)
- The Nation: Melville Revival of the 1920s, Wikipedia: Raymond Weaver